예컨대 현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에서는 라틴어로 '사람'이라는 뜻의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가 그대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그 외 다른 국가들의 언어에서는 통상적으로 '이미지 관리를 위해 쓰는 가면'을 의미한다. 깊게 들어가면 SNS에서 사용하는 프로필 사진이나 어떤 인물이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특정 고유 이미지 같은 것도 페르소나로 설명하기도 한다. 영화계에선 어떤 감독이 자신의 분신 혹은 상징처럼 애정하는 배우를 뜻한다.
현대 온라인상에서 일컫는 컨셉이라는 용어가 이에 해당한다.
<나무위키>

(참고로 글에 올리는 이미지는 그냥 그날그날 올리고 싶은 이미지를 올릴 뿐이지 글의 내용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회사 앞에 엔플라잉 서동성 생일 카페를 하길래 아이스크림 하나 사고 찍었다.)
자료 조사를 나무 위키에서 해오면 폐급이라고 평가받겠지만, 지금은 과제를 하는 것도 아니니 그냥 찾아서 첨부한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자아 찾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닌 '진짜 나'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하는 존재다. 어쩌면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속이는 중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쫓는 나에 의해 스스로 가스라이팅을 당한다. 이거에 대해서 어젯밤 집 가는 길에 또 생각하다 문득 이런 걸 페르소나라고 하는 것인가? 해서 찾아봤다. 컨셉이라는 용어가 페르소나를 설명해 준다 하면, 충분히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러니까, 나의 컨셉질이란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나 멘탈 진짜 세서 그런 거에 안 흔들려'가 아닌가 싶다. 물론 스스로 입 밖으로 저런 말을 내뱉은 적은 전혀 없다. 내뱉었으면 지금엔 너무 쪽팔려서 이런 글 쓰지도 못했다.(그러니까 왜냐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까)
나는 저번 편에서도 썼듯이 정말 세상밖으로 나가서 부딪혀 본 경험이 잘 없다. 아르바이트는 적지 않게 해 봤지만 내 생각엔 그런 것과는 개념이 다르다. 그러니까 내 혼신의 힘을 다해 자존심 까일 일을 겪어본 적은 없다는 뜻이다. 아르바이트는 NPC정도의 존재감과 신분으로 일을 한 거지 '나 자신'으로의 평가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회사에 첫 입사를 하면 상황은 아주 급격하게 바뀐다.
나는 나 자신으로써 그 회사의 가장 최하단의 위치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순간부터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기어코 자존심은 상하고 자존감은 깎여나갈 일들이 생긴다. 다행히도 아직 회사에서 눈물을 흘린 적은 없지만 눈물이 맺힐 정도로 화가 나고 자존심이 구겨지는 일은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집 가는 길에 엄마한테 전화 걸어 펑펑 운 적도 있어 봤다. 물론, 회사에서의 나의 평가가 나에 대한 평가의 전부는 아니다. 절대 전혀!! 다만 'OO회사 XXX'라는 신분이더라도 내 이름을 건 나에 대한 평가가 처음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쨌든 그럴 때마다 나는 괜찮은 척, 신경 안 쓰는 척을 했다. 그게 나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라고도 생각했다. 실상을 헤집어보면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자존심이 센 나는 멘탈이 부서지고 이런 현실에 마음 붙이지 못해 갈대보다도 더 흔들렸다. 이제는 인정한다.
살면서 내가 가졌던 가치관은 언제고 조금씩 수정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우스운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을 통과하는 '절대 진리'라는 것은 '모든 것은 죽는다.'라는 명제 외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결국 가변성을 가지고 인간의 생각이 그것들 중 가장 빠를 것이다.
하다 못해 내가 멘탈이 세다는 것도 어릴 때는 맞았을지 모르지만 인생의 풍파를 겪으면서 약해진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컨셉질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변한 나를 따라잡지 못했을 뿐이다. 누구나 이런 점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들은 창피하지만 가끔 타인에 의해 간파되기도 한다.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지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진짜 나를 파악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고 발전적인 삶의 동력이 된다. 내가 진짜 나를 부정했던 이유는 이상의 나와 현실의 나의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그건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내면적으로 성숙하며 내 감정을 잘 다룰 줄 아는 그런 것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때의 나를 돌이켜보면 그냥 애x끼였다.
몇 년 전부터는 나 자신을 똑바로 보기 시작했다. 이미 내가 나 자신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이라도 했다. 또래에 비해 늦은 출발과 그로 인한 초조함. 어릴 때부터 사회적인 기준에 나를 맞추지 않았지만, 사회에서 내가 뭔가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결국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니까 허세와 스스로의 거짓말로 몸의 표피를 풍선처럼 부풀린, 복어 같은 내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부피를 가진 나의 내면에 '나'를. 물론 아직도 한참이나 나는 모자란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비로소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을 때 내 삶은 출발선에 섰다. (여기에도 또 거짓말하기 위해 이러한 과정들로 나를 사랑하게 됐다고 적지는 않겠다. 나는 뭐가 됐건 어릴 때부터 좀 오만했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뭔가를 모르는 게 너무 싫어서 차라리 회피하고 아니면 아는 척했던 나는 이제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한다. 못하겠는 건 못하겠다고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보고 싶은 건 해보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진짜 내가 모르는 게 뭔지, 아는 게 뭔지, 해보고 싶은 게 뭔지 감을 익혀가고 있다. 그런 나를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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